희노애락

[스크랩] 간송 전형필 탄생 100주년을 기뻐하며 3 - 별은 졌지만 별빛은 남아

한 울 타 리 2006. 6. 15. 16:05

지난 두 번 글에 간송의 탄생과 문화재 수집 동기 그리고 그 일화를 정리했습니다. 이번에는 그 후 간송의 동성학원 설립과 더불어 문화재가 전쟁을 견뎌낸 이야기, 그리고 간송의 죽음과 그 뒷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제는 1938년부터 조선어과목과 한문교육을 폐지하고 우리역사는 물론 말조차 정규교육에서 제외시키는 악날한 민족문화말살정책을 감행합니다. 또 1940년 2월에는 창씨개명이라는 인류역사상 전무했던 종족 개조정책을 강행하는데 소위 내선일체를 표방하는 황국식민화 교육을 강요하게 되었으니 민족문화와 역사, 민족교육은 풍전등화의 위기로 내몰리고 있었습니다.

 

간송은 1940년 보성고보를 인수하는데 보성고보는 간송이 태어난 같은 해인 광무 10년(1906년)에 왕실과 국가재정을 총괄하던 함경도 명천출신의 이용익(1854-1907)이 <흥학교 이부국가(興學校 以扶國家)- 학교를 일으켜 나라에 도움이 되자>라는 고종의 칙명을 받들어 설립한 사립학교입니다.

 

그 후 이용익이 노일전쟁 중 고종의 밀지를 받들어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을 기습선포하고 한일의정서 체결을 반대하다가 일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후 그곳에서 울분을 삭히다 병사한 후 보성고보는 어린 손자인 이종호가 맡게 되는데 이종호 역시 신채호, 이갑 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니 천도교 재단이 이를 인수해 이끌어 가지만 천도교주 손병희(1861-1921)가 3.1 운동 때 민족대표로 나서면서 보성교보 교장인 최린을 앞세워 독립선언서를 이곳에서 인쇄하는 등 독립운동의 본거지로 삼으면서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경영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 불교재단으로 넘어갔다가 1935년 재단법인 고계학원이 인수하는데 고계학원은 원래 부실한 재단으로서 학교운영만 더욱 피폐케 해놓고 파산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간송은 보성고보를 인수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위창 오세창이 천도교재단에서 보성고보를 운영할 때 현기장의 자격으로 이를 직접 운영했으며 어의동 보통학교 3학년 시절 종로 골목에서 보성고보생들이 앞장서서 외치던 3.1 운동의 현장을 지켜보며 가슴 벅차했던 기억이 생생하였기에 보성고보를 인수하여 민족교육의 요람으로 육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송은 해방 후 3.1 절 기념행사에만은 반드시 참석하여 직접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해 그날의 감격을 보성인들에게 각인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고계학원은 학교를 넘기는 과정에서 간송의 의지를 간파하고 학교를 파산시킨 부끄러움도 잊고 엄청난 청구금액뿐 아니라 부채는 부채대로 인수하길 요구했고 심지어 칠판지우개 하나까지 값을 요구했으며 금액도 나날이 달라지는 등 한마디로 돈 벌 궁리만 했습니다.

 

바로 고계학원이 조선일보를 세운 방응모씨 운영했던 학원으로서 초대 이사장인 방응모는 친일파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거론되는 자이니 간송 집안과는 극히 대별되는 것입니다.

 

 

 <향원익청>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다.간송. 지본담채.  

염계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따온 문구. 간송은 스스로 서화가를 자처하지 않았을 뿐

그의 서화, 서예 실력은 탁월했다.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연꽃 절지화로써 색채의

대조가 자연스럽고 가시와 연꽃이 자연스럽게 어울러진 그림이다.

 

 

이처럼 간송은 일제 말 더욱 광폭해진 식민지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 정책에 몰두하는 일제에 맞서 오로지 보화각을 지키고 보성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 시기에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는데 당시 조선총독인 남차랑이 보화각을 한번 보고 싶다는 청을 해 왔는데 이 사실을 김승현을 통해 전해들은 간송은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통독의 위치와 권한이란 지금의 대통령의 권한보다 10배는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전 조선인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남차랑이 막상 보화각에 도착했을 때는 문은 잠겨있고 아무도 마중 나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당황한 김승현이 간송에게 달려가 보니 간송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니 꼬박 30분을 보화각 앞에서 남차랑을 기다리게 한 후에야 박물관을 안내해 보이고 돌아가게 하니 그 후 그 어떤 일본인이 보화각을 방문해도 30분 이상은 기다려야 하는 관례가 생겼다고 합니다. 

 

1945년 8.15  드디어 일본은 무리한 전쟁에서 패망하고 해방이 왔습니다. 간송은 해방 후 문화재 수집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어디에 있건 이젠 내나라 내 민족 품에 있는데 꼭 본인이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해방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쟁취한 해방이 아니었기에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남북으로 갈리는 비운을 맞게 되는데 이는 완전한 독립을 원했던 민족의 기대가 산산이 조각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비운은 6.25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문화재는 36년간의 일제 통치 동안 보다 더 참담한 파괴를 당하는데 이는 보화각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인민군이 진주했을 때 북단장은 기마부대에 징집되어 아름다운 정원은 폐허가 되었으며 보화각 소장품은 전세가 불리해 후퇴할 때 가져 가고자 큰 목통 속에 아무렇게나 포장 되어졌습니다. 이때 인민군은 전문가 두 사람을 시켜 포장과 목록정리를 시켰는데 한 명은 소전 손재형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이 혜곡 최순우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인민군이 이 물건을 가지고 가게 하지 못하도록 매일 물건을 쌓다 풀었다는 반복하며 심지어는 손재형은 멀쩡한 다리에 붕대를 매고 다리를 다쳤다며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보화각 지하실에 있던 위스키를 이용해 담당자들을 매수하여 작업을 하지 않고 버티었으니 9.28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완전히 포장되어서 상자에 보관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 결국 인민군은 빈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중국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소전과 혜곡이 포장해 놓은 그대로 미국헌병이 호송해 열차 편으로 부산으로 보내져 부산 영주동에 별장을 빌려 보관했습니다.

 

그때 전부 가져갈 수 없었기에 추사, 겸재, 단원, 혜원 등의 작품들과 도자기중 일급 물품만 골라 가져갈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중국서화나 중국자기, 수 만권의 장서와 골동품들은 그대로 놓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난리 와중에서도 부산으로 가기 전 덕수궁에 있는 혜곡 최순우 선생을 찾아가 박물관 물건들의 피난계획을 확인하며 걱정을 하셨으니 그 얼마나 깊은 마음이었는지 짐작되고도 남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후 혜곡을 만난 간송은 그곳 고두동씨 댁에 좋은 물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함께 찾아가는데 아무 말 없이 물건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혜곡에게 그 물건들 전부 북단장에 있던 자기 물건들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북단장에 남아있던 물건들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1953년 서울이 수복되자 간송은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부산에 있던 물건을 다시 서울로 가져다 놓았는데 서울로 물건을 옮기고 열흘 후 그 별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건물이 전소가 되니 문화재를 지키고자 하는 하늘의 보살핌이 없었다고 어찌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보니 아궁이 앞에는 당판(唐版) 진적들이 불쏘시개 감으로 산처럼 쌓여있었고 사방 벽과 뚫어진 창문에는 고활자본과 내각판으로 도배가 되 있었으며 몇 트럭분의 고서적들이 중앙시장에 나와 쌓여 있어서 다시 사 와야 했습니다.

 

일제 암흑기 36년 동안 전 재산을 다 바쳐 민족문화를 보호하고자 수집했던 수많은 문화재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우리 민족의 손에서 파괴되어 버리는 광경을 목도한 간송의 심정이 어떠 했겠습니까? 아마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삼불암> 간송, 지본   삼불 김원룡에게 써준 현액

 

 

이러한 당시 상황은 삼불 김원룡의 대담에 의하면 더욱 기가 막힙니다

“6.25때 혜화동 로타리를 걸어가는데 거지가 피나오는 무릎을 이상한 종이로 닦고 있어 보니깐 고판본 찢은 종이라 놀라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보성중학교 뒤에 가면 산같이 쌓였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때는 별도리가 없었지요” 

 

 

<아락서실>  혜곡이 꿈에 서재 이름을 보고 간송에게 부탁하여 서재 현액으로 받은 글씨

‘을미(1955) 가을 내 벗 혜곡이 꿈속에서 이 구절을 얻었다. 간송’ 이라는 관서를 달았다

 

 

그 후 간송은 문화재 보존위원으로 활동하며 혜곡 최순우, 초우 황수영, 수묵 진홍섭 등과 깊이 사귀며 특히 혜곡과 초우와는 매일 만나는 사이였기에 혜곡이 간송과 가까이 있기 위해 집을 간송미술관 바로 앞에 있는 지금 [최순우 옛집]으로 이사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친우들과 함께 전국 각지로 고적조사를 다녔으니 이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혜곡, 초우, 수묵이란 아호는 모두 간송이 짓고 각인하거나 현액으로 휘호해주었으며 문패까지도 모두 써주었다고 합니다.

 

 

<최순우 옛집입구>

 

 

그 후 민족미술의 발전을 위해 [고고미술] 이란 동인지를 발간했는데 당시 보성학원 인수와 전쟁, 잃어버린 문화재를 다시 인수하는 과정에서 거의 모든 재산을 사용했기에 매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특히 보성학교가 서무과의 잘못으로 엄청난 부채를 짊었지게 되어 이를 대납하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겪었다 합니다. 오죽했으면 아들을 유학 보내는데 단돈 $ 130 밖에 가져가지 못할 정도로 곤란한 처지였으나 소장한 문화재를 통해 경제적 곤란함을 피하고자 하는 생각은 한 차례도 가지시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동인지를 만들어 언제나 재정적 후원을 감당하면서도 한번도 곤란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고미술>  1960년 8월 창간. 188호(1990.12)부터 美術史學硏究 로 제호를 바꾸었다.

 

 

하지만 하늘도 간송이 해야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1962년 1월 26일 간송은 급성 신우염으로 갑자기 타계합니다. 그의 죽음은 민족미술계의 전체의 크나큰 슬픔이며 민족의 슬픔이었습니다.  [고고미술] 제 19.20 합집에 거의 모든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목이 메이는 슬픔으로 간송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실었던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간송이 돌아가시자 정부는 그의 문화재 수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62년 8. 15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추서하고 뒤이어 64년 대한민국문화훈장국민장을 다시 추서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훈장이라도 그가 살아있음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 1965년 고고미술동인들인 동빈 김상기, 남운 이홍직, 혜곡 최순우, 초우 항수영, 수묵 진홍섭, 삼불 김원룡 등이 발기인이 되어 북단장에 민족민술연구소를 설립하고 보화각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하기로 하여 1966년 4월에 정식으로 민족미술연구소가 문을 열어 유물을 정리하기 시작하니 이때 혜곡 최순우 선생님의 거의 양아들과 다름없는 최완수(현 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가 연구소로 들어와 지금까지 간송의 평생사업을 계승하게 됩니다. 그 후 1968년 6월에 수만권의 장서중 2000여권의 한적을 분류, 정리하여 [간송문고한적목록]을 출간합니다.

 

그 후 1971년부터는 소장문화재에 대한 연구작업을 병행에 매해 봄, 가을로 기획전시를 갖기 시작하며 그때마다 연구성과물인 [간송문화]를 발간했는데 올 해 봄 전시회로 70호가 출간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부분은 간송미술관 주요 소장품의 주된 경향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간송은 위창 오세창 선생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위창은 문화재를 보호하는데 어느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는가를 알아보는 게 중요한 문제로 떠오릅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만 간송의 문화재 수집의 방향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창 오세창은 대대로 역관의 집안으로서 선대부터 중국의 신문화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위창의 학문과 예술은 선대로부터 8대째 내려온 역관의 가계로서 200여 년 축적된 문화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드리는 집적이요, 결과물을 철저한 고증으로서 결집한 누대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 역매 오경석은 청나라가 외국에 유린당하는 현실을 접하면서 조선도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을 예감했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여 조선화하여 새로운 사회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북학사상을 철저히 가지신 분입니다. 이 북학사상은 나중에 개화사상으로 이어집니다.  

 

즉 가학으로 내려온 북학사상에 영향을 크게 받아서 개화사상이 투철했으며 같은 중인계층이면서 역관이었고, 부친의 친구인 우선 이상적의 문하에서 한어, 서화, 금석문을 공부하면서 깊은 학식과 감식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이상적의 소개로 중국의 금서학자들, 서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삼한금석록] 이란 저서를 남기기도 합니다.

 

역매 오경석의 스승인 우선 이상적이 누구입니까? 바로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며 ‘세한도’ 의 주인공입니다. 세한도 오른쪽 상단을 보면 ‘우선시상’ :우선이 보시게 라고 시작됩니다. 즉 ‘세한도’ 는 추사가 스승을 잊지 않고 보살펴주는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보내는 편지 입니다.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였던 이상적 밑에서 공부한 역매 오경석이 어떠한 경향을 가졌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위창 오세창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이러한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학맥은 오세창에 의하여 서도금석학적인 면이 계승되어 당대 고증학의 최고봉이 될 수 있었으며 서화 및 서예의 대가, 뛰어난 감식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창 오세창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 될 만큼 민족정신이 투철한 학자였습니다. 3.1 만세운동으로 3년간 복역한 후 석방되었을 때 일본제국주의는 조선통치정책을 이전 무력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전환을 꾀하는 시기였습니다.

 

다시 말해 조선민족문화를 말살하기 위해 광범위한 역사왜곡사업을 전개하던 중이었습니다. 바로 식민사관을 조선민중에게 주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식민사관은 민족의 역사를 2천 년으로 제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근거로 삼국유사만이 정통 역사서로 인정하여 고대사를 제거합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고대 중국대륙을 힘차게 개척했던 역사를 거세시켜 한반도에 국한된 반도사관으로 이어지며 이는 조선 고유한 민족문화는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고 중국문화의 아류로 폄하하는 방향으로 결론지어 버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의도는 수천 년을 우리에게 문화적 도움과 영향을 받아왔음을 부정하고 우리 민족고유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으므로서 자신의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위창은 바로 이러한 문화침략을 본질을 정확히 깨뚤어 보았습니다. 민족문화의 독창성을 증명하여 저들의 의도를 무력화 시켜야 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보화각지석> 1938년 윤 7월 5일 보화각 상량식 날 위창 오세창이 쓴 보화각지석.

 

[때는 무인년 윤 7월 5일 간송 전군의 보화각 상량식이 끝났다. 내가 북받치는 기쁨을 이기지 못해 이에 명(銘)을 지어 축하한다. 우뚝 솟아 화려하니, 북곽(北郭)을 굽어 본다. 만풍(萬品)이 뒤섞이어, 새집을 채웠구나. 서화 심히 아름답고, 고동(古董)은 자랑할만. 일가에 모인 것이, 천추의 정화로다. 근역의 남은 주교(舟橋)로, 고구(攷究) 검토 할 수 있네. 세상 함께 보배하고, 자손길이 보존하세]

 

 

자 이쯤 되면 눈치 빠른 분들은 왜 간송미술관의 회화 소장품이 조선후기 진경산수 이후 작품에 집중되었는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위창과 간송은 가장 조선적인 화풍이 일어나 당시 동양의 최고의 문화적 독창성의 성과를 보였던 영,정조 시대의 조선의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과 풍속화 등에 주목한 것입니다.

 

따라서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관아재 조영석, 현재 심사정, 해원 신윤복 등의 화가들에 주목했으며 옛 중국 고대 문체에 충실하면서도 조선의 독창적인 글씨인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의 글씨 등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또 당시 일본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회화나 서적보다는 도자기와 석조미술이였고 회화에서 진경산수와 풍속화를 비롯한 우리 그림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도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점이었습니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정선, 김홍도, 심사정, 신윤복의 그림을 대단히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지금과 그 당시의 위상을 비교해보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깨닫고 있는 겸재와 단원, 현재, 혜원 그림의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은 추사로부터 이상적, 역매 오경석, 오세창, 간송, 김원룡, 최순우로 이어져 큰 줄기를 만들었으며 그 밑에서 공부하고 영향을 받았던 현재의 수많은 미술사학자들 최완수, 정양모, 유홍준, 강우방, 오주석 등등의 전문가들이 그 장엄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간송선생님으로 출발하여 지금까지 40여 년간의 간송미술관을 지켜오며 연구해온 민족미술연구소의 공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진경시대 문화의 우수성과 고유성을 직접 확인해 내었기에 민족미술연구소를 통해 40여명의 박사를 배출했던 것입니다.   

 

소장된 문화재뿐 아니라 간송미술관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앞으로 문화재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간송미술관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현재 미술사학의 역사는 일제의 모진 탄압과 민족내부전쟁 그 이후 대부분의 뜻있는 미술사학자들이 북으로 올라 가버려 거의 초토화된 황무지속에서 일구어낸 선각자들의 피나는 고통과 노력의 결실이며 그 힘으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한국 고미술의 이해], [완당평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가 쓰여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은 무서운 것이며 민족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으로 묶여 있는 것이고 미적 감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아름다움은 우리가 가장 정확히 알 수 있으며 그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없을 만큼 강력하게 우리 정신에 내재되어 있고 세계 그 어디에서도 희석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세대의 사명은 선각자들이 밝혀놓은 우리 문화에 대한 우수성을 세계인들에게 다시금 확인 시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직도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한 문화재를 꼭 되찾아와야 합니다. 특히 프랑스에 있는 외규장각에 있던 의괘는 반드시 돌려받아야 하며 그 의괘를 통해 다시한번 우리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고 증명하여 새로운 국가 도약의 정신적 발판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간송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저는 하늘이 뜻을 세우면 그 뜻에 걸맞은 사람을 내고 그를 통해 하늘의 뜻을 펼치게 하는 오묘한 안배가 숨어있는 것 같았습니다. 민족의 큰 별이었던 간송은 떠났지만 그 별빛은 여전히 우리들 가슴에 살아있습니다.

 

또한 하늘의 수많은 별빛이 반짝이듯이 수많은 문화재들이 우리가 그 아름다운 빛을 알아봐주길, 한번만이라도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봐주길 고대하며 반짝이고 있는것입니다.

 

 

끝으로 간송미술관 연구위원이었으나 작년에 타계하신 오주석 교수님의 저작 [한국의 美-특강] 서문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 합니다.

 

[문화, 그것은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보람, 특히 지금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 바로 정체성의 문제다.
문화는 축구와 달리 우리 스스로 일구어야 한다.

히딩크보다 열 배의 능력을 가진 사람이 도와주어도 대한민국의 문화예술은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한다. 그것은 축구처럼 2년 만에 갑자기 훌륭해질 수 없다. 문화예술은 오랜 세월 지극한 정성으로 가꾼 다음에야 비로소 꽃을 피우는 생물인 까닭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문화는 빼어난 선수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문화인, 예술가들이 아무리 피나는 노력을 해도 한 나라의 문화수준이란 결국 그것의 터전을 낳고 함께 즐기는 전체 국민의 안목만큼 정확히 그 눈높이만큼 올라설 수 있다.....

 

....(...)......이 책을 붉은 악마들에게 바친다. 그러나 그들에게 이렇게 고쳐 말하고 싶다.

“꿈은 이루어진다!  훨씬 이전부터 우리는 이미 아름다운 꿈들을 줄곧 이루어왔던 겨레이기 때문이다 ”]

 

 

 

시리즈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제 글에 있는 내용 대부분은 개인적으로 간송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느낀 점과 아래 참고 자료에 있는 내용들이며 그 중 따로 고치지 않고 직접 옮겨 놓은 부분들도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참고문헌 :[간송문화] 41호-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51호- 간송이 문화재 수집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70호- 간송 전형필

               [간송선생님이 다시찾은 우리문화유산이야기] 한상남  도서출판 샘터 

               [위창 오세창]  이승연   도서출판 이회

 

 

 

2006. 06. 15

 

 

 

금강안金剛眼

출처 : 우회전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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