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감상

[스크랩] 천경자

한 울 타 리 2006. 4. 8. 14:11

전생에 자신은 황후였다는 여자가 있다. 소녀 시절에 스스로 지어 붙인 “경자”라는
이름을  자신의 본명인 “천옥자” 앞에 두었고,  그 후 그 이름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 외로움등을  신비롭게 표현할 줄 아는, 대한민국의 대표적 여류화가가 된다.




천경자 화백은 어려서부터 독특한 감수성을 가지고 화가가 되기를 꿈꾸었다.



꽃과 나비-1973

그녀가 자랄 당시 대부분의 여자는 소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었던 일제시대였는
데, 교육과 문화에 열린 가정환경 덕분에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칠 수 있었다.



꽃다발을 안은 여인

고등학교를 마칠 때 즈음 집안에 혼담이 들어왔으나, 그녀는 그림을 공부
하고 싶었고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물론 집안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뉴욕 센트럴 파크

그녀는 정신병자 흉내를 내면서까지 부모님께 유학을 보내달라고 조른다.
결국 부모님은 허락하셨고, 그녀는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다고...



두상

동경여자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그녀는, 유학 중 만난 사람과 결혼한다.그러나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신문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을 만났지만 곧  헤어진다.



어느 여인의 時

“나물 캐러 갔던 소녀가 허리띠인 줄 알고 꽃뱀을 집으려다가  물려 죽은 일이
있었어요. 무서우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끌리는 그 장면이 어렸을 때부터 머리
에 남아 언제가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지요. 그러나 내가 처음 그린 뱀은 꽃뱀이
아니라 한 뭉텅이의 푸른 독사였어요.”



이탈리아 기행

인생의 실패와 좌절을 맛보고 그녀가 자신의 삶에 저항하기 위해 택한 소재가
뱀이었다.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재직하면서 뱀에 대한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미인도

6.25전란으로 부산에 피난을 간 그녀는 거기서 뱀 그림 전시회를 연다.‘젊은 여자가
뱀을 그렸다’면서  신기했고, 곧 “천경자”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인도 올드 델리

그녀는 1974년, 18년간 재직하던 홍익대 교수직을 버리고, 문득 아프리카로 떠난다.
남태평양과  유럽, 남아메리카까지... 여행에서 느낀 선명한 색감과 원시적  인상을
자신의 작품 세계에 반영하기 시작한다



사월

1991년 그녀는 곤경에 처하게 된다. 국립 현대 미술관 소장의 “미인도”에대한
진품 시비 사건 때문에.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고, 감정사들은 그녀의 작품이라고 판정하고 만다.



자살의 미

입장이 난처해진 미술관에서도 그녀작품이라 주장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그녀는 자신의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고,
큰 딸이 있는 미국으로 떠난다. 그 후 진품 위조 사건의 범인이 밝혀지나, 



 청춘의 문

그녀는 한국에 다시 돌아오지 않은 채 지금도 스케치
북을  옆구리에 끼고 중남미를 여행하고 있다고 한다



카이로 테베 기행





황금비







 
출처 : 그대가 있어서 행복 합니다
글쓴이 : 大道無門 원글보기
메모 :